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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토크-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 그라피매거진
  • 승인 2018.02.1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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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초상
마음의 소리 vs 뻔한 잔소리

1년 전, 부모님이 살고 계신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것도 같은 아파트 단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으니 더 자주 뵙고 식사도 같이 하고 이런저런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며 화목한 대가족을 이룰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되도록 안 부딪치려 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아가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그건 순전히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죠. 래퍼를 꿈꾸는 소녀처럼 아들을 디스(Diss)하지 못해 안달인 건지, 아니면 제 얼굴만 보면 시상이 떠오르듯 참신한 트집거리가 샘솟는 건지 아무튼 눈만 마주치면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40년 넘게 해왔는데 여태 새로운 잔소리가 남았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 매일 밤 자기 전에 내일은 또 큰아들한테 무슨 잔소리를 해서 속을 뒤집어 놓을까 고민하는 것 같다니까요? 물론 원인 제공자는 두말할 것 없이 저 자신입니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기를 하나, 모아놓은 재산이 있길 하나, 애는 점점 커가는데 왜 저리 태평하게 사는가 부아가 치밀어 오를 만도 하죠. 그런데 제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내세울 장점이 없으니 단점이라도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는 겁니다. 오히려 가족이라 더 숨기고 싶은 거겠죠.

듬직하고 풍요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애통하고 그래도 언젠간 좋아지겠지 안심시켜드리지 못해 울적합니다. 자식의 번듯한 미래가 자신들의 영광인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죠. 아마 저뿐만 아니라 모든 자식들의 마음도 그러할 겁니다. 세상의 어떤 자식이 일부러 부모의 마음을 안쓰럽게 만들고 싶겠어요.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잔소리를 멈출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나, 거짓말을 해서라도 안심시키고 싶은 자식의 마음이나 대동소이합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시네마천국>(1988)을 만든 이탈리아의 거장이죠. 그의 1990년작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에는 이런 부모의 안타까움과 자식의 미안함이 쓸쓸하게 교차합니다. 자식들의 찬란한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가 긴 여행길에서 그동안 감춰왔던 진실을 차례로 만나게 됩니다. 멋지게 사는 자식들을 만나 풍선처럼 부푼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던 부모의 마음. 그런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어낸 오남매의 슬픈 거짓말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죠. 또 하나,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오랜 콤비 엔니오 모리코네가 들려주는 음악이 애틋한 부성애를 자극합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슬픈 거짓말
아내와 사별한 뒤에도 고향인 시칠리아에서 홀로 사는 마테오. 이번 여름엔 자식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해 미리 방갈로까지 빌려놨건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도 고향을 찾지 않죠. 바빠서 못 오는 것뿐이라고 애써 자위하던 마테오는 결국 직접 자식들을 찾아 도시로 갑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나폴리. 큰아들 알바로가 살고 있는 곳인데 어쩐 일인지 집에는 아무도 없고 전화조차 받질 않습니다. 자동응답기로 넘어갈 때마다 시간이 멈춘 듯 초조해하는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알바로는 두문불출이었죠. 하는 수 없이 이번엔 둘째 아들 카니오를 찾아갑니다. 로마 정당의 의젓한 정치인이 된 카니오를 보며 새삼 뿌듯함을 느끼죠. 하지만 사실 카니오는 국회의원들의 연설문을 대신 써주는 보좌 역에 불과합니다. 아버지가 실망할까봐 짐짓 잘나가는 정치인 흉내를 냈을 뿐입니다.

이번엔 딸 토스카를 만나기 위해 피렌체로 이동합니다. 그가 알고 있는 토스카는 항상 런웨이의 중심을 차지하는 톱 모델이었죠. 하지만 그럴듯한 연극 뒤에 숨겨진 실상은 초라했습니다. 그녀는 무명의 속옷 모델인데다 젖먹이 아들을 둔 미혼모였으니까요. 눈이 두 배는 커 보이는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도 마테오는 자식들의 실체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어느 순간부터 자식들의 연극을 진작에 꿰뚫어봤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믿고 싶지 않았겠죠.

불길한 예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밀라노에서 만난 굴리엘모도, 토리노에 살고 있는 큰딸 노르마도 모두 다른 남매들과 형편이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변변찮은 직업에 결혼생활마저 파경 직전이었죠. 심지어 연락이 닿질 않던 알바로가 사실은 자살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듣게 됩니다. 마테오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믿기 힘든 심경입니다. 그들이 웃으며 건넸던 모두 잘 지낸다는 얘기를 당연하게 믿었었는데.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니. 마테오는 생살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에 가슴을 움켜잡습니다.

한껏 쪼그라진 채 다시 찾은 고향.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쓸쓸합니다. 여정을 이어가는 동안 그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바라봤던 어린 시절의 자식들은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죠. 하지만 이 허망함을 아내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어떡할까요? 자식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테오도 아내의 무덤 앞에서 다 잘 지내고 있더라며 슬픈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밖에요. 힘겹게 하루를 연명하는 자식들의 남루한 현실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족이란 차라리 외딴 섬과 등대처럼 서로를 멀리서 바라볼 때 더 행복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너 주려고 멸치볶음 했다는 핑계로 얼굴 보고 잔소리 한번 더 하기 위해 안달할 게 아니라 어련히 알아서 잘 지내겠지 상상해주면 더 고마울 것 같은 게 못난 자식의 속내겠죠. 물론 큰아들이 멸치볶음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이제는 좀 알아주면 더 고맙겠지만요. 그래도 오늘은 엄마한테 전화 한 통 해야겠습니다. 모두 잘 지내고 있다고. 걱정하는 마음 다 알지만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고.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모두 잘 지내고 있다오
Stanno Tutti Bene, 1990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주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미셸 모르강, 발레리아 카발리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산(山),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