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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진실 사이 - 영화 리뷰 '파도가 지나간 자리'
  • 김수정 에디터
  • 승인 2018.08.1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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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포스터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포스터
파도가 지나간 자리
The Light Between Oceans, 2016
감독 데릭 시엔프렌스
주연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레이첼 와이즈
 
사랑이 떠나간 자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가 유행처럼 번졌던 적도 있었죠.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인데요. 저는 짧은 두 줄의 시에서 사람마다 절대적으로 혼자 해결해야 할 고독의 존재를 봤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고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작은 섬. 그곳은 소도(小島)이자 곧 소도(蘇塗)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절대 고독의 공간에도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공기 속을 파고들기 마련이죠. 자유, 낭만, 사랑을 노래하기엔 섬만 한 공간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푸른 바다 위 둘만의 작은 낙원에 머무는 동안 누구라도 경계심을 풀고 한껏 들뜨게 되니까요. 이번 ‘무비토크’에서 소개해드릴 영화는 <파도가 지나간 자리>입니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의 2016년 작품인데요. 원제는 The Light Between Oceans, ‘바다 사이 등대’란 뜻을 담고 있죠. 영화를 보고 나면 원제도 이해되고 의역한 제목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단 생각이 듭니다. 거센 파도 같은 시련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들, 그럼에도 꿋꿋하게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한 줄기 불빛 같은 삶. 여운이 꽤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스크린샷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스크린샷

주연을 맡은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이 영화를 계기로 부부의 연을 맺어 화제가 되기도 했죠.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영상미를 선보이며 감성 풍부한 멜로를 완성해냈는데요. 핵심 배경인 등대섬을 찾기 위해 300군데가 넘는 곳을 둘러보며 최적의 장소를 찾는 열의를 보였죠. 원작 소설을 쓴 M.L. 스테드먼도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영상으로 옮길 줄은 몰랐다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

악보 위의 화가, 알렉상드르 데플라가 작곡한 범상치 않은 선율이 오프닝 크레딧으로 흐르는 가운데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톰 셔빈.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섬의 등대지기를 자원해서 이곳까지 왔죠. 세상의 전쟁은 끝났지만 톰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참혹한 살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질 못했죠. 그래서 등대지기에 자원했습니다. 독으로 독을 치료하듯, 혼자라는 미칠 것 같은 고독감이 전쟁의 깊은 상처 위에 새살이 돋아나게 해주길 바라면서 말이죠. 무인도에서 보내는 6개월이란 시간은 그에겐 너무나 간절한 세상과의 격리였습니다.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스크린샷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스크린샷
운명과 선택의 두 얼굴 
그가 근무를 하게 된 섬의 이름은 야누스. 양면의 얼굴을 가진 신의 이름이었죠. 이 야누스란 이름은 영화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희망과 절망, 사랑과 미움, 용서와 증오 등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감정의 양극단을 오가는 등장인물들을 은유하고 있죠. 보통 사람 같으면 석 달도 못 버티고 그만하겠다고 할 텐데 톰은 오히려 신수가 훤해졌습니다. 섬에서의 침묵과 절대 고독이 그에겐 보약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요. 유일하게 제어되지 않는 욕망이 하나 있다면, 그건 야누스로 오기 전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 이자벨을 향한 그리움뿐. 결국 임시직에서 정규직으로 채용이 확정되던 날, 톰은 이자벨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톰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죠.
 
마침내 결혼과 함께 야누스에 첫발을 내딛은 이자벨. 이제 톰은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그들만의 낙원에서 행복을 키워갈 준비를 합니다. 마음도 훨씬 건강해졌고 젊고 씩씩한 육체는 아직 그대로였으니까요. 아이들을 씀풍씀풍 낳아 이 섬에서 마음껏 뛰놀게 해줄 거라는 기대도 있었죠.

그때였습니다. 사랑과 희망 가득한 미래만 바라보던 야누스의 얼굴이 돌연 슬픔과 원망을 향해 고개를 돌린 건. 축복처럼 찾아든 새 생명을 유산으로 떠나보내고 어렵게 다시 잉태한 두 번째 아기마저 연거푸 잃고 맙니다. 원작 소설에선 모두 세 번의 유산을 한 것으로 나오지만 영화 속에서는 두 번의 유산으로 갈무리됐죠. 상실의 아픔이 짙은 안개처럼 내려앉은 등대섬. 조각배 한 척이 거센 파도에 해변가로 떠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배 안에는 숨을 거둔 남자와 함께 울고 있는 갓난아기가 타고 있었죠.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스크린샷
영화 '파도가 지나간 자리' 스크린샷

시신을 수습하고 아이의 생존을 육지에 알리려는 톰을 이자벨이 막아섭니다. 그녀는 운명처럼 나타난 이 아이를 가슴에 품고 싶다고 말하죠. 바다가 보내준 선물임이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영화는 아내에 대한 연민과 지켜야 할 윤리 사이에서 번민하던 톰이 결국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 갈등이 점화됩니다. 행복해하는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 루시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마음은 늘 자루 속의 고양이처럼 두렵고 불안한 톰. 오늘의 이 결정을 평생 원망하고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눈앞의 행복을 선택한 이자벨.

당연한 수순처럼 루시의 친모가 등장하고 이제 두 사람의 갈등은 세 갈래로 더 복잡하게 확장됩니다. 서로를 내 몸같이 사랑했던 톰과 이자벨을 기다리는 건 이제 파멸의 시간뿐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키운 원망과 자책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 톰의 위대한 사랑이 결국 이자벨의 미움을 녹여버리고 두 사람은 뜨겁게 화해합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톰의 침묵도, 이자벨의 원망도 모두 이해가 됩니다. 딱히 어느 편을 들기가 어려운데요. 그저 이 부부를 휩쓸고 간 가혹한 운명의 파도가 안쓰러울 뿐이죠. 결말에 가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루시가 톰을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전히 등대처럼 우뚝 서서 언젠가 찾아올 그녀를 기다렸던 그의 삶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바다와 등대 사이, 그곳엔 여전히 섬이 있습니다. 그 섬에 가고 싶습니다.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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