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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변화 - 영화 리뷰 '초콜렛'
  • 성재희
  • 승인 2018.12.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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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콜렛' 포스터

초콜렛
Chocolat, 2000

감독 라세 할스트롬
주연 줄리엣 비노쉬, 주디 덴치, 조니 뎁

초콜렛, 변화를 부르는 달콤함
전통은 오랜 세월 공동체가 축적해온 경험과 지식의 창고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희생,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위대한 유산. 그러므로 전통은 지켜야 할 질서가 되고 본받아 마땅한 미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누구든 이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이단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죠. 하지만 변화의 바람은 어느 시대든 까마득히 높은 전통이란 이름의 산맥을 넘어 불어오기 마련입니다.
 
이 바람에 맞서느냐, 바람을 등에 업고 가느냐에 따라 세상은, 그리고 인간의 삶은 실로 많은 부침을 겪어왔습니다. 시민사회란 늘상 그렇게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수의 기득권과 변화를 원하는 서민들의 투쟁을 통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으니까요. 물론 모든 전통이 변화를 가로막는 뒷방 늙은이의 고집인 것은 아닙니다. 바꿔 말해서 변화가 반드시 우리의 삶을 좋은 쪽으로만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고요. 전통과 변화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뿐.
 
이런 전통과 변화의 충돌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서로 다른 세대 간에 숱하게 찾아오는 갈등이기도 하죠. 내가 지금껏 옳다고 믿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언제까지 과거의 가치만 높이 받들고 변화의 바람에 등 돌리고 있을 건지 답답한 것도 이해가 되죠. 서로를 ‘꼰대’와 ‘꼴통’이라 손가락질하는 슬픈 세상의 풍경입니다.
 
이렇게 전통과 변화의 충돌이 등장하는 영화로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2000년 작, <초콜렛>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그는 <개같은 내 인생>(1985), <길버트 그레이>(1993) 같은 명작을 연출한 스웨덴 출신의 거장인데요. 무언가 결핍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허무, 상실감을 따뜻한 시선으로 채워주는 작품들을 선보여왔죠. <초콜렛>에 등장하는 두 개의 대립각은 시장을 중심으로 한 마을 사람들과 바람에 실려 이곳까지 떠밀려온 신비한 여인 비안느입니다. 마을은 신앙과 율법의 테두리 속에서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죠. 반면 비안느는 신앙도 거부하고 공동체의 규율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신 몰약을 만들 듯 정성껏 초콜렛을 저으며 마을 사람들의 허기진 영혼을 살포시 유혹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초콜렛' 스크린샷 
희망은 바람을 타고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 무려 100년 동안 큰 변화도, 발전도 없고 그렇다고 쇠락의 길 끝에 서 있는 것도 아닌 마을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그래왔듯이 정해진 규율 내에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죠. 그것이 태초에 자신들에게 허락된 자유를 속박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막상 규율 밖의 생활은 미지로 가득한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게다가 시장 레너드의 완벽에 가까운 통치는 이들의 결속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는 견고한 벽이었죠. 원칙과 질서. 그건 레너드가 신앙처럼 떠받드는 절대적 가치였으니까요. 누구도 시장의 눈 밖에 나길 원치 않았고 아무도 평화로 위장된 마을의 숨 막히는 억압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북풍을 타고 신비로운 여인, 비안느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죠.
 
섬겨야 할 율법을 무시하고 억눌러야 할 욕구를 외려 팽창시켜버리는 그녀의 행동은 마을을 어수선하게 만듭니다. 교회에 나오라는 시장의 권유를 거절한 최초의 여인인 동시에, 경건해야 할 사순절 기간에 초콜렛 매장을 오픈하는 불경한 행동까지 일삼았으니까요. 게다가 초콜렛이라니! 달콤한 악마의 유혹 같은 음식으로 이 선하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비안느를 지켜보는 시장 레너드는 점점 마음이 급해집니다.
 
한편 시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 명, 두 명 비안느가 만든 초콜렛에 매혹되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그녀의 초콜렛은 실로 최고의 명약이었죠. 고개 숙인 욕망을 발딱 일으켜 세우고, 상처입은 영혼을 달래주며, 각박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었습니다. 사랑과 용기. 그건 율법과 신앙에선 배울 수 없었던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난생처음 단맛에 취한 아이처럼,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사랑을 갈구하는 게 삶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알게 됐죠.
 
영화 '초콜렛' 스크린 샷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로가 이끄는 집시 일당이 찾아오면서 마을은 또 한 차례 심상찮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비안느가 로맨스의 최초 유발자라면, 로는 구속받지 않은 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마을의 전통과 절제라는 미덕이 두 사람 때문에 산산조각이 날 위기에 처해 있었죠. 보다 못한 시장은 위험천만한 계획을 세우지만 그의 야심과는 반대로 마을의 운명은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갑니다.
 
<초콜렛>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비안느가 견지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매사에 수동적이고 생기 없는 마을 사람들과 늘 활기차고 씩씩한 비안느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데요. 이는 그녀가 세상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주죠. 전통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가치로 인식하는 것. 그건 비안느의 매장을 때려 부수다가 초콜렛에 취해 쓰러져 잠든 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에서 느껴집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해선 안 되며, 우리의 선함은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빛이 난다”는 신부의 강론이 의미하는 것처럼, 전통과 변화는 서로 맞서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미래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겠지만, 묵을수록 깊고 그윽해지는 술도 있는 법. 다가올 2019년에는 묵은 술 같은 안녕과 새 술 같은 희망이 술잔 가득 찰랑이기를 기원합니다. 
 
영화 '초콜렛' 스크린 샷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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