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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 눈뜰 때 - 영화 리뷰 '웨이킹 네드'
  • 성재희
  • 승인 2019.02.2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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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웨이킹 네드' 포스터 

90분간 이어지는 엔도르핀의 향연

일주일에 한 번,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슈퍼까지 걸어가 복권을 삽니다. ‘2등 7번! 1등 탄생 임박! 이번 주 행운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란 플래카드가 호객하듯 바람에 나부끼는 곳. 하지만 호객꾼의 말만 믿고 들어간 술집이 으레 그렇듯, 현실은 기대와 다르기 마련이죠. 10년 넘게 꾸준히 복권을 사고 있지만 뭐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어쩔 땐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세요. 5천만 인구 중 매주 10명 가까운 10억 자산가가 탄생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10년째 나만 그 영광된 선택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게 말이나되는 얘긴가요? 살면서 딱히 나쁜 일을 저지른 적도 없고각종 공과금, 지방세도 따박따박 잘 냈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아프거나 나름 성실히 살아온 인생인데, 왜 이런 행운이 유독 나만 요리조리 피해가는 걸까요?
 
정히 나는 안 되는 인생이라면 친구들이라도 복권이든, 부동산이든, 스톡옵션이든, 뭐든지 간에 인생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건만, 어떻게 된 녀석들이 재물복 없기로는 저와 용호상박입니다. 그래도 가끔 있죠. 술에 취해 복권 한 장 사들고 이거 당첨되면 절반씩 나눠 갖자며 어깨동무할 땐 왠지 이번엔 진짜 될 것 같은 흥분에 휩싸이곤 합니다. 꼭 내가 아니라 지금 내 옆에서 술에 떡이 된 채 “너랑! 나랑! 지인짜 반씩 나누는 거다?” 같은 말을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이 불쌍한 주정뱅이라도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말입니다. 실제로 내 주변의 친구 혹은 이웃에게 거액의 복권 당첨이란 행운이 찾아왔다면, 게다가 그와 비밀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돈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커크 존스 감독의 1998년 아일랜드 영화 <웨이킹 네드>는 이런 흥미로운 가정에서 출발하는 코미디입니다. 이웃집네드의 집에서 발견된 한 장의 복권이 온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죠. 게다가 복권의 주인인 네드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죽은 네드를 다시 살려내야만 복권 당첨금을 수령할 수 있는 상황. 주민들은 엄청난 사기극의 공범이 되겠노라 자청해서 나섭니다. 얼핏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의 탐욕으로 비칠 수 있지만, 가난하고 순수한 마을 사람들의 유쾌한 일상은 그들의 완전범죄를 응원하게 만들죠. 만약 네드가 살아 있었다고 해도 그 역시 미리 약속했던 것처럼 기꺼이 당첨금을 나눠 가졌을 겁니다.
 
영화 '웨이킹 네드' 스크린 샷

51개의 마음이 일궈낸 기적

북아일랜드의 외딴 마을 툴리모어. 죽마고우재키와 마이클은 어느 날 마을 주민 중 누군가 복권에 당첨됐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52명밖에 안 되는 시골 마을에서 복권 당첨자 찾기는 식은죽 먹기. 가장 수상한 사람부터 한 사람씩 차근차근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고 탐문수사에 나선 두 사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좀처럼 누구인지 정체가 드러나질 않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없는 살림에 성대한 홈파티까지 열었건만, 남의 배만 불리고 여전히 당첨자는 오리무중입니다. 단 한 사람,오늘 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독거노인 네드만 빼고 말이죠. 재키와 마이클은 친구의 행운을 축하해주기 위해 그를 찾아갑니다. 물론 그 행운을 자신들에게도 나눠 주면 더욱 좋겠단 바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평생을 복권 당첨만 바라며 외롭게 살아온 네드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군요. 당첨 복권을 손에 꼭 쥔 채 말입니다. 홀로지낸 지 오래된 네드에게 복권을 찾으러 올 가족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렇다고 이걸 네드와 함께 땅에 묻을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재키와 마이클은 네드인 척 위장하고 당첨금을 타내기로 합니다. 그들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넉살 좋은 재키가 네드 행세를 하기로 입을 맞췄는데요. 하필이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복권회사 직원 때문에 새가슴 마이클이 네드가 되어야 할 상황이 벌어졌지 뭔가요. 천신만고 끝에 복권회사 직원을 감쪽같이 속여넘긴 두 남자. 하지만 더 놀랄 일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복권 당첨금이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135억원이란 사실이었죠.
 
재키와 마이클은 고심 끝에 이 행운을 주민들과 공평하게 나누기로 결심합니다. 단, 모두가 이 사기극에 동참해야 하는 조건을 걸었죠.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마을 사람들은 당첨금을 포기해야 하고 재키는 더블린으로 자수를 하러 가야 합니다. 똘똘 뭉쳐 당첨금을 나눠 갖느냐, 양심에 따르고 행운을 마다하느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부유함이 주는 행복을 선택합니다. 한편 네드의 장례를 치르는 와중에 불시 방문한 복권회사 직원 때문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을 배짱 좋게 모면하는 건 역시 재키입니다. 네드의 장례식을 멀쩡히 살아있는 마이클의 장례식으로 위장해버렸거든요. 하지만 졸지에 고인이 된 마이클도, 마을 주민들도 모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재키의 위트 섞인 추도문 속엔 사랑과 우정, 그리고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는 진심이 담겨 있다는 걸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거액의 당첨금을 앞에 두고 이전투구를 벌였다면, 탐욕 혹은 누군가의 양심이 공동체의 달콤한 연대를 깨버렸다면, 아마 이 영화가 그렇게 많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지 못했을 겁니다. 51명의 주민들은 놀랍도록 단단히 뭉쳐 위기를 모면하고 동요를 막아냅니다. 그건 이 엄청난 행운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낸 것이나 다름없죠. 툴리모어의 주민들은 이제 모두 부유하게 살아갈까요? 글쎄요. 아마도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박한 삶을 이어 갈 것 같습니다. 때로 지칠 때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잔 술에 위로받고 위로하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겠죠. 그 작은 여유와 행복이야말로 그들이 꿈꾸던 미래였으니까요.
 
영화 '웨이킹 네드' 스크린 샷

웨이킹 네드
Waking Ned, 1998
감독 커크 존스
주연 이안 배넌, 데이빗 켈리, 피오눌라 플리나건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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