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하기
희미한 첫사랑의 그림자 - 영화 리뷰 '초원의 빛'
  • 성재희
  • 승인 2019.03.26 12: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초원의 빛' 포스터
꽃이 지고 사랑도 지네
첫사랑. 가만히 입에 넣고 굴려보면 새콤한 과일 향이 날 것 같은 단어.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를 걷다 보면 유독 더 생각나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죠. 잘 살고 있는지, 나를 기억이나 할는지, 왜 그때 더 간절하지 못했는지 따위의 미련인가 후회인가 모를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희미한 추억으로나마 남을 수 있는 게 바로 첫사랑이니까요. 첫사랑을 다룬 영화는 셀 수 없이 많죠. 그중 엘리아 카잔 감독의 1961년작 <초원의 빛>은 짧지만 찬란했던 사랑을 가장 현실적으로 담아낸 수작입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은 평생을 ‘밀고자’라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야 했던 터키 출신 감독인데요. 인간으로서는 홀대받았던 딱한 삶이었지만 그의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환대받았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워터프론트>(1954) 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죠.
 
제작 연도는 1960년대지만 영화 속의 시간적 배경은 1928년입니다.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했고 기성세대의 전통과 신세대의 자유가 막 충돌하기 시작하던 때였죠. 세상의 모든 딸들은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 순결하고 정숙한 여인의 삶을 강요받았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자신의 뜻이나 꿈이 아닌 아버지가 바라는 직업과 미래를 위해 뛰어야 했죠. 사랑은 그들이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시대와의 갈등, 기성세대와의 불화, 연인과의 이별.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은 남자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미쳐버린 여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라스트 신 5분 속에 이들의 운명이, 그리고 영화를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1928년 미국 캔자스.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아직 이곳은 평화롭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버드와 디니 역시 전과 다름 없이 생기발랄했죠. 이들은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소문난 커플입니다. 예쁘고 잘생긴 선남선녀의 만남을 모두들 부러워했죠. 그런데 두 사람에겐 사람들이 모르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육체관계를 두고 옥신각신 갈등을 빚고 있다는 건데요. 결혼까지 결심한 여자의 모든 걸 소유하고 싶은 버드, 그를 사랑하지만 순결을 지켜야만 하는 디니. 매번 되풀이되는 실랑이에 둘 다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죠.
 
영화 '초원의 빛' 스크린 샷
그때,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사실 버드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중압감을 디니와의 사랑을 통해 해소하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겁니다. 그걸 사랑이라 못 부를 이유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고 싶다는 게 나쁜 생각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죠. 디니도 지금 버드가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순결을 잃는 순간 사랑도 떠나갈까봐 두렵습니다. 그 와중에 버드의 누나 지니가 신년파티에서 술에 취해 또 말썽을 부립니다. 그녀는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 탓에 버드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지 오래였죠. 술에 취한 누나를 농락하는 비열한 인간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마는 버드. 주먹에 패인 얼굴보다 더 쓰라린 것은 이 숨 막히는 현실이 주는 절망이었습니다. 급기야 디니에게 이별을 고하고 말죠.
 
그 날 이후 버드는 변했습니다. 마치 디니에게 복수라도 하듯 다른 여자들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고 다녔죠. 오로지 버드만 바라보고 버드만 사랑했던 디니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 대목에서 제목이 담긴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가 첫 등장합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라.’
 
이 아름다운 문장조차 디니에게는 그저 머리에 쓴 금고아를 조이는 주문 같습니다. 그건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이 이별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 그를 잃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거란 두려움.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아득한 상실감일 겁니다. 지독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디니는 자살까지 시도하고, 부모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상황이 꼬여버린 것은 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의 자살이란 충격적인 상황을 맞게 되죠. 사랑의 신열에 들떠 있던 청년이 졸지에 집안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됩니다.
 
영화 '초원의 빛' 스크린 샷
그리고 대망의 라스트 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병원에서 퇴원한 디니는 다시 버드를 찾아갑니다. 확인하고 싶었겠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곤 말 못할 겁니다. 하지만 버드는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는 몸입니다. 앞날이 창창했던 부잣집 아들이 지금은 거름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고 가난하고 초라한 농부의 모습으로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이 가난하고 고단한 남자의 삶이 잠시나마 다시 끓어올랐던 디니의 가슴을 진정시킬 때, 지금은 꼴이 이래도 돈이 모이면 곧 근사한 맥주 파티를 열어 모두를 초대하겠다고 버드가 말할 때, 우리 모두는 입술을 조개처럼 다물고 말없이 지켜볼 뿐입니다. 이 웅변 같은 침묵은 파란만장했던 그들의 첫사랑이 완전히 끝났음에 동의하는 공감의 신호입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디니는 언젠가 수업시간에 배웠던 시를 외기 시작합니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 그것이 돌아오지 않음을 서러워 말아라 / 그 속에 간직된 오묘한 힘을 찾을지라’. 수백, 수천 번 묻고 또 물었던 질문.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아마 디니는 그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요, 황홀했던 첫사랑은 실패로 끝났지만 삶은 여전히 계속돼야 하니까요.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1961
감독 엘리아 카잔
주연 나탈리 우드, 워렌 비티, 팻 힝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