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하기
안녕 빛나는 우리들의 인생 - 영화 리뷰 '투 라이트'
  • 성재희
  • 승인 2019.07.29 10: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투 라이프' 스크린 샷
채움과 비움
아우슈비츠는 인류사의 가장 끔찍한 학살의 대명사로 자주 인용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절멸, 단어 그대로 지구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없애버리기 위해 세워진 수용소죠.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에 의해 총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는데요. 이 중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유대인의 수는 1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실로 어마어마한 생명이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죽은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옥의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기억은 잊고 싶다고 잊혀지는 기억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육체뿐 아니라 영혼에도 커다란 흉터를 갖고 사는 그들에게 어쩌면 삶은 끝나지 않는 그날의 악몽이었을지도 모르죠. 
 
메릴 스트립 주연의 <소피의 선택>(1982)을 보면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소피에게 독일인 장교는 잔인한 선택을 강요합니다. 아들과 딸 둘 중 하나만 살려줄 테니 지금 선택하라고.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아들을 선택했지만 그 역시 딸과 함께 죽은 거나 다름없었죠. 세상의 어떤 어미가 자식을 사지로 밀어 넣고 단꿈에 젖을 수 있을까요?
 
영화 '투 라이프' 스크린 샷
장 자크 질베르만 감독의 <투 라이프>(2014>에 등장하는 세 여자의 삶도 소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아우슈비츠는 매일 밤 모습을 바꾸고 나타나는 악몽 속의 괴물이었습니다. 떨쳐내려 할수록 젖은 모래처럼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날의 기억. 가족과의 생이별, 혹독한 노동, 목숨 앞에 한없이 비열해지던 순간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심정이 어떤 건지 우리로선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죠.
 
<투 라이프>는 장 자크 질베르만 감독의 어머니와 그 친구들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세 여자가 15년 만에 다시 만나 바캉스를 떠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한 프랑스어 바캉스는 ‘자유로워지는 것’, 혹은 ‘덜어내고 비우다’란 뜻을 갖고 있죠. 세 여자의 뜨거운 재회의 장소가 여름 해변 피서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다시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기 위해선 슬픔과 두려움, 증오를 비워내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요.
 
슬픔이여 안녕
엘렌, 릴리, 로즈가 15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여름의 낭만과 열정이 넘실대는 프랑스 베르크 해변에서 이뤄진 재회였죠. 세 사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입니다. 꽃다운 20대에 만나 지금은 모두 주름진 중년 여인이 됐지만 한눈에 서로를 알아봅니다. 좀 늦긴 했지만 젊은 시절 못 입어본 비키니를 입고 물놀이도 하며 이들은 소녀처럼 즐거운 시절을 보내죠.
 
영화 '투 라이프' 스크린 샷
그런데 어둠이 내리고 축복의 건배까지 하고 나자 간신히 억눌러놨던 아픈 기억이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떠올리기조차 끔찍한 상처인 게 분명한데, 굳이 그걸 끄집어내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서 위안받고 싶은 심정이라니. 그렇게 엘렌과 릴리가 자학과 가학의 미묘한 경계선에서 트라우마를 자극할 때, 오직 로즈만이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어떤 대화에도 끼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사실 로즈야말로 마음속에 가장 큰 응어리를 안고 사는 여자입니다. 그는 어린 딸의 목숨과 맞바꿔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다시 아이들을 낳았지만 마음 놓고 사랑해주지도 못했죠. 그러니 아우슈비츠에 대한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고 꺼내고 싶지도 않을 수밖에요.
 
한편 엘렌 일행은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 피에르와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식사에까지 초대하게 되는데요.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믿는 이 천진난만한 청년에게 엘렌은 어쩐지 마음이 갑니다. 피에르가 자신을 여자로 바라봐주는 것 같아 가슴이 뜁니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여자로서의 본능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랄까요? 그건 지금의 남편에게선 받을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영화 '투 라이프' 스크린 샷
밤이 깊어지면서 로즈도 마침내 시커멓게 그을린 내면의 상처를 꺼내놓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이 겪은 끔찍한 기억은 없던 일이 될 순 없습니다. 아우슈비츠는 매일 밤 다시 살아나는 좀비 같은 기억이니까요. 그러니 온 힘을 다해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와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의 불행에 아파하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말입니다.
 
그날 밤, 뭔가를 결심한 듯 엘렌이 피에르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난생처음 황홀한 일탈을 경험하죠. 아픔 저 너머에 있는 남자와의 따뜻한 교감에 엘렌은 비로소 여자로서의 기쁨에 눈을 뜹니다. 비록 남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엘렌에게 피에르와의 짧은 사랑은 자신의 불행했던 젊음을 치유할 씻김굿이었을 겁니다. 누구도 그에게 부정하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 없습니다.
 
좋은 기억도, 슬픈 추억도, 아픈 상처까지도 모두 제 허물인 양 끌어안고 보듬어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잔인한 과거는 여전히 그들의 주변을 굶주린 들짐승처럼 맴돌겠지만, 세 여자는 오늘 인생이란 방명록에 이렇게 남기고 싶습니다. 여기, 어제를 잊고 오늘을 기뻐하며 내일을 맞이할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름을 함께했노라고 말입니다.
 
투 라이프
A la vie, To Life, 2014
감독 장 자크 질베르만
주연 줄리 드빠르디유. 조한나 터 스티지, 수잔 클레망
안녕 빛나는 우리들의 인생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