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하기
행복이 조물조물 - 영화 리뷰 '리틀 포레스트'
  • 성재희
  • 승인 2019.09.23 09: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인생은 곧잘 요리에 비유되곤 합니다. 어떤 향신료를 쓰느냐에 따라 복잡미묘한 맛을 내는 음식처럼 우리네 인생에도 즐거움, 슬픔, 원망과 그리움 같은 게 뒤섞여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음식이라는 철학으로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도 하죠. 그 속에 배어 있는 사랑의 감칠맛과 인생의 쌉싸래한 맛이 눈과 귀를 풍요롭게 채워줍니다.
 
요리를 통해 인생이란 이름의 거대한 성찬을 차려낸 영화들을 기억해보면,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의 <터치 오브 스파이스>(2003)나 그 이름도 유명한 <달콤 쌉사름한 초콜릿>(1992), <카모메 식당>(2006) 등이 순서 없이 떠오르는데요. 최근 작품 중에서는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2018>를 흥미롭게 봤습니다. 아니, 맛봤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려나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포스터
 
이 작품의 원작은 일본의 만화가 이라가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입니다. 일본에서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 2편으로 나뉘어 영화로 제작된 바 있죠. 임순례 감독은 동일한 원료를 사용하되 자신만의 플레이팅을 선보였는데요. 도시 생활에서 누리지 못했던 긍정과 여유, 음식을 통해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맛깔스럽게 담아냈습니다.
 
그래요, 소소한 행복. 일상에서 느끼는 선물 같은 휴식. 사실 이 작은 쉼표들이 거창한 계획이나 오랜 준비가 필요한 것들은 아니잖아요. 온기 가득한 한 끼의 식사, 해가 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어느 날 하루쯤은 자연 속에서 누리는 사색과 평화로도 충분하죠. 이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는 법에 익숙해지면, 외로움도 친구가 됩니다. 혼밥, 혼술 같은 1인 문화가 각광받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비로소 외로움을 애써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작은 용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영화는 주인공 혜원이 느닷없이 고향을 찾아오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겨울에서 시작해 봄부터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에 집을 떠나는 그녀의 사계절을 지켜보게 되죠. 모두가 떠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이 답답하고 불편한 농촌으로 그녀는 대체 왜 돌아온 걸까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크린 샷
자연과 요리라는 작은 숲
사실 그녀도 즐겁게 나선 귀향길은 아닙니다. 간절히 바랐던 임용고시에서 탈락하고, 사랑도 실패했으며 찬란했던 미래는 유통기한이 몇 시간밖에 남지 않은 삼각김밥처럼 폐기될 위기에 처해 있었죠.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힘찬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떠날 땐 미처 예상 못했던 오늘입니다.
 
집에 왔다는 안도감보다 먼저 그녀를 맞이한 것은 격렬한 허기. 항아리를 박박 긁어 마련한 한 줌의 쌀, 눈밭에서 캔 배추로 국을 끓여 급하게 몸에 온기를 밀어 넣고 나자 비로소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이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죠. 이럴 때 집에 엄마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혜원만 유실물처럼 남겨둔 채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춘 지 오래입니다.
 
그날 이후로 혜원은 자급자족 나 홀로 농촌 라이프를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게 배운 레시피로 그날그날 있는 재료로 야무지게 뚝딱 차려서 끼니와 간식과 안주를 해결합니다. 며칠이 지나자 그녀를 이곳까지 오게 한 삶의 허기도 조금씩 잠잠해집니다. 텃밭을 갈고 작물을 키우고 화사한 봄꽃으로 근사한 파스타를 만들고 햇감자로 포슬포슬한 빵을 굽다 보면, 뽑아도 뽑아도 잡초처럼 자라나던 걱정들도 한숨 수그러들었죠.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크린 샷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기쁨과 매일매일 혼자 갖는 사색의 시간은 혜원의 생각들을 뭉근하게 뜸들입니다. 여름 땡볕에 새파랗던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가듯 지금 이렇게 잔뜩 날 서 있는 원망도, 꿈 앞에서 도망치듯 떠나왔다는 자책도, 혼자 뒤처져 있다는 초조함도 언젠가는 말랑말랑 먹기 좋게 변해갈 거란 걸 말입니다. 자연과 요리라는 작은 숲에서 보낸 1년 동안 혜원은 쑥쑥 자랐습니다. 
 
무언가를 빨리 이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땀 흘리고 맛있게 먹고 한껏 게으름 피웠던 나날들. 그건 지친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준 소중한 시간이었죠.
그래서 혜원은 어떻게 됐냐고요?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의 서울 생활 시즌 2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땐 더 야무지고 씩씩해져 있겠죠.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맛이 깊어진 곶감처럼 말입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크린 샷
 
리틀 포레스트, 2018
감독 임순례
주연 김태리, 류준열, 진기주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beautygraphy@naver.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