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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여자들 - 영화 리뷰 '로마'
  • 성재희
  • 승인 2019.11.0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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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 포스터
그와의 첫 만남은 <위대한 유산>(1998)이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동명 원작 소설을 멋지게 재해석했던 영화죠. 물론 기억 속에는 그의 심미안이 완성해낸 원작의 위대한 재해석보다 기네스 팰트로와 에단 호크의 분수대 키스신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말이죠. 그리고 8년 뒤, <칠드런 오브 맨>(2006)으로 다시 그와 조우합니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에 거둔 가장 뛰어난 디스토피아적 성과로 꼽을 만큼 대단한 작품이었어요. 물론 <그래비티>(2013)가 보여준 기술적 완성도가 훨씬 높지만, 저의 과도한 혈중어둠지수는 <그래비티>의 황홀함 대신 <칠드런 오브맨>의 음울함에 더 끈적하게 반응하더라고요.

그래요. 이 장황한 사설은 모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최신작, <로마>(2018)를 이끌어내기 위함입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을 거머쥐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의 차세대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되어 더욱 화제가 됐던 작품이죠. 사실 이 영화와 넷플릭스의 만남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로마>란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유년 시절로 되돌아가는 유한한 과거를 의미한다면, 넷플릭스는 앞으로 영화라는 콘텐츠가 뻗어나갈 무한한 미래거든요. 과거의 유산과 미래의 자원이 만나 완성한 <로마>라는 이름의 영광. 이 새로운 시도가 영화라는 엔터테인먼트를 얼마나 더 성장시켜갈지 흥미진진합니다.

제목의 ‘로마’는 이탈리아 로마가 아닙니다. 멕시코시티의 대표적인 부촌 이름이죠. 1970년대 멕시코의 백인 중산층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요.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시점은 그들에게 고용된 멕시코인 가정부, 클레오입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단순히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거나 값싼 연민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외려 소외의 대상이자 상처 입은 영혼인 클레오가 느리지만, 씩씩하게 세상의 풍랑 속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죠. 발표하는 작품마다 깃들어 있던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이 모노톤의 영상 속에서 사금처럼 반짝입니다. 
 
영화 '로마' 중 한 장면.  
 
그녀들의 따뜻한 연대
물청소가 한창인 복도. 바닥에 고인 물 위로 비행기가 지나갑니다. 카메라는 철저하게 클레오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그녀처럼 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되죠. 클레오의 하루는 늘 분주합니다. 치워도 치워도 뒤돌아보면 또 쌓여 있는 개똥처럼,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떠안고 있는 그녀에게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는 주문은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그래도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친구 페르몬이 원치 않은 임신만 시켜놓은 채 말도 없이 내빼기 전까진 말이죠. 그 무렵, 고용주 소피아의 신변에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릅니다. 그녀의 남편이 외도에 빠져 가족들을 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시대적 배경인 1970년대 초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했습니다. 독재권력과 시민들 사이의 격돌이 빈번했던 격동의 시기였죠.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형편없이 낮았고요. 정부라는 사회적 안전망과 가족이라는 사적 안전망 양쪽에서 핍박과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변혁을 꾀합니다. 시내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에 휘말려 배속의 아이를 사산한 클레오와 남편과의 완전한 이별을 결심한 소피아가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소피아의 아이들이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그만 파도에 휘말리는 사고가 발생하는데요. 그들을 구하기 위해 클레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세찬 파도를 찢으며 바다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장장 12분 동안의 롱테이크. 입에 침이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고입니다.

마침내 불길한 예감을 물리치고 그들이 모래사장에서 생존의 기쁨을 나눌 때,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오릅니다.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가 나도 그들을 부둥켜안고 “괜찮다. 다 괜찮다”고 울먹이고 싶어집니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그렇게 가족이 되고 서로와 뜨겁게 연대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첫 장면과 똑같이 비행기가 지나갑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가 아래로 굽어보던 시선이 지금은 위를 향해있다는 것. 흑백이지만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다는 것. ‘인생, 한때 흐리고 맑음’이라는 듯 말입니다. 
 
로마, 2018
감독 알폰소 쿠아론
주연 얄리차 아파리시오, 마리나 데 타비라, 낸시 가르시아 가르시아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beautygraph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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