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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로맨스 - 영화 리뷰 '러블리 스틸'
  • 성재희
  • 승인 2020.01.0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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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블리, 스틸> 포스터 
사랑이란 이름의 묘약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마감은 다가왔죠. 모두가 새 희망을 노래하는 시류에 편승해 ‘출발’이라든가, ‘용기’를 다룬 영화로 2020년을 시작해볼까 했었는데요. 
 
올해는 이렇게 달력에 의존한 곤궁한 소재의 글쓰기로부터 벗어나자는 목표를 세웠다는 핑계로,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젊은이들의 당찬 미래를 응원하고 미용인의 건승을 기원하는 거야 굳이 저까지 힘을 보태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겠어요?
 
인생의 노년기를 가리켜 ‘황혼’이라고 부르죠. 저물어가는 해처럼 남은 삶을 잘 마무리해야 될 때가 됐음을 의미하는데요. 그들에게 새해는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몸은 더 쇠약해지고 기억력은 예전 같지 않죠. 다시 땅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하루하루 실감할 뿐. 환희 대신 회한에 잠기는 날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하지만 이들의 늙은 심장을 다시 힘차게 뛰게 만드는 묘약이 하나 있죠. 그건 바로 사랑입니다. 
 
스무 살의 사랑이 풋사과처럼 상큼한 매력이 있다면, 황혼의 로맨스는 깊은 밤 달이 차오르듯 은은하게 무르익는 운치가 있습니다. 삶의 유효 기간이 임박한 지금, 누군가가 다시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이 기쁘고 가슴이 벅차오르죠. 그래서 황혼의 사랑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진짜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러블리, 스틸>은 니콜라스 패클러 감독의 2008년 작품인데요. 박근형, 윤여정이 출연했던 <장수상회>(2014)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재미있는 사실은 니콜라스 패클러 감독이 스물세 살에 완성한 시나리오라는 겁니다. 나이를 의심하게 만드는 연륜과 감성이 아닐 수 없네요.
 
70 평생 홀로 지내며 사랑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살아온 노인 로버트. 어느 날 옆집에 메리라는 이름의 여인이 이사를 옵니다. 그녀도 로버트만큼이나 나이 지긋한 노인인데요. 뜻밖에도 그녀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으면서 단조롭기만하던 로버트의 인생이 놀랍도록 활기차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들의 시간
친구와 동료들에게 자문까지 구해가며 열심히 준비한 메리와의 첫 데이트. 비슷한 나이, 비슷한 고민. 인생의 황혼기에서 실로 오랜만에 동질감을 느끼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집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만약 이게 꿈이라면 영영 깨고 싶지 않다고,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어도 좋다고 말입니다.
 
다행히 꿈이 아니었습니다. 로버트와 메리는 매일매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 사이가 됐죠. 그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젊은 연인들처럼 내일은 또 어떤 즐거움을 함께 할까 고민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연애를 시작한 후 로버트가 일하는 마트의 사장 마이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로버트를 도왔죠. 메리의 딸 알렉스 역시 스스럼 없이 다가와 친절을 베풀었고요. 그런데 왜일까요? 마이크도, 알렉스도 로버트를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 비밀스러운 감정이 어려 있군요. 로버트는 아직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자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요? 로버트는 지금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당분간 이 행복과 여유에 흠뻑 취해 있고만 싶었죠.
 
니콜라스 패클러 감독은 이 지점부터 본격적으로 반전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메리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로버트는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죠.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그는 한순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메리, 마이크, 알렉스. 그들은 모두 로버트의 가족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치매에 걸린 남편, 그리고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그들이 꾸민 연극이었죠. 자칫 신파로 흐를 뻔한 이야기의 균형을 굳건히 지켜낸 것은 노년의 사랑을 바라보는 젊은 감독의 웅숭깊은 시선, 그리고 나이 듦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두 배우의 힘입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생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오래된 연인들. 젊어서도, 늙어서도 우리는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낭만의 상징입니다.
 
러블리, 스틸 Lovely, Still, 2008
감독 니콜라스 패클러
주연 마틴 랜도, 엘렌 버스틴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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