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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티스트
  • 그라피매거진
  • 승인 2015.08.3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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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티스트


<그라피>의 창간 11주년을 맞아 각 세대를
대표하는 헤어 디자이너 6인이 <그라피>의
뷰파인더 앞에 섰다.
예술가로서, 미용인으로서,
단독자로서 풍부한 인생을 살아온,
인기 절정의 20대 아티스트부터 반세기
넘도록 오롯이 미용업계에 헌신한
레전드까지. 우리 시대의 아티스트를 만나보자.

에디터 윤태홍
포토그래퍼 사재성



다시 없을 여제, 하종순
우리 시대 미용계에서는 다시 없을 여왕이자 ‘세계 무대’를
최초로 인식시킨 헤어 디자이너 하종순. 한국 미용사의
부흥기와 명동 살롱 시대의 전성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르네상스를 거쳐 세계이미용협회(OMC) 부회장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관통하며 예술가로서, 경영자로서
드라마틱한 78년 인생을 살아온 하종순 회장은 헤어
디자이너라는 그 순수 혈통의 시작이다.
3남 1녀 중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하종순 회장은 성신여고를
졸업하고 종로에 있는 이모가 운영하던 미용실에 취업했다.
1958년 나이 스물한 살 무렵 그곳에서 하종순 회장은
카운터를 맡았다. 그때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있던 미용실에 놀러 갔다 평생의 스승을 만났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 미용 기술을 익혀온 오엽주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 1960년 오엽주 미용실 매니저
생활 후 하종순 회장은 헤어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가만히 지켜보니까 헤어 디자이너들이 돈도 잘 벌고 멋있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오엽주 선생을 꼬셨지. 저도 머리하면
안 될까요? 하고. 머리를 만지는 게 그저 좋았지.” 명문가로
시집을 간 하종순 회장은 남편 몰래 미용을 계속했다. 그러다
덜컥 권리금 80만원을 주고 1962년 마샬 미용실을
개업했다. 25세의 나이에 그렇게 마샬의 역사가, 명동
미용실의 역사가 시작된 것.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은 거의
모두 마샬을 다녔다. 김지미 김자옥 김창숙 등 여배우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도맡으면서 명동 한복판을 굳건히 지키다
보니 당연히 제자도 많이 탄생하게 됐다.” 박승철, 박준,
준오 등 헤어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성공한 역대급 미용인도
하종순 회장의 제자. 덧붙여 고현정, 김혜리, 염정아,
궁선영 등 미스코리아 왕관을 쓴 이들을 줄줄이 나열하지
않고서는 마샬뷰티살롱을 설명할 수 없다. 미스코리아 진만
15명, 총 120명을 배출했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대한미용사회중앙회 회장을 3번
연임하며 국내 미용계의 발전에 힘썼을 뿐 아니라 동양인
최초로 1998년 세계이미용협회 부회장으로 임명되어 한국
미용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였다. 이후 1998년
‘세계이미용협회 헤어월드’를 한국에서 개최한 공을 인정받아
2000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늘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하종순 회장은 헤어 디자이너로서
미용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게으르지 않았다. 목표가 있을
때마 다 전력투구했고,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미련할
때까지 인내했다. 차별화된 고급 시스템과 세분화된
서비스로 고급뷰티살롱의 이미지를 최초로 재현하고,
제5공화국 시절 청와대에 들어가 영부인의 상징이던 업
스타일을 세련된 단발머리로 바꿨으며, 1991년 강남
논현동에 예식과 식사를 겸할 수 있는 호텔식 웨딩홀도 업계
최초로 세웠다.
하종순 회장은 마샬뷰티살롱명동점을 개점한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54년째 운영하고 있다. 아직도 매일 아침 명동 1
호점으로 출근한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과 같은 것. 인터뷰 전일에도 디자이너를 훈계하느라 진을
뺐다고 탄식하는 하종순 회장은 위엄 넘치는 음성으로
당부했다. “미용을 배웠으면 열정을 가져라. 완벽해질
때까지 인내하라.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실력을 쌓아라.
절름발이 디자이너는 용납할 수 없다. 모든 걸 다 완벽하게
배워서 디자인하라. 돈 때문에 움직이지 마라.”


뉴 룩 창조자, 이희

"수식 없이 온전히헤어 디자이너로 존재하는 게
가장 멋있다고 생각한다.
난 그냥 헤어 디자이너이고 싶다."


“처음 민두에 가발을 씌우고 빗었을 때 예감했다. 아! 나 이거 되게 좋다. 짜릿한 밀착감을
경험했다. 미용이 무척 재미있었고 끝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냥
운명이었던 거다.” 올해로 28년 차. 인생의 절반 이상을 헤어 디자이너로 존재해온 이희
원장이 긴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이희 원장은 지난해 도산공원 뒷길 아늑한 곳으로 살롱을
옮겨 청담동 1세대 헤어 디자이너라는 임의의 규정에서 벗어났다. “비가 잔잔히 내리던 어느
날 신사동 도산파크를 걷는데 문득 도쿄가 연상 되는 거다. 그리고 이 건물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냥 툭 오게 됐다. 이것 역시 운명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신사동 도산파크
일대가 패션 뷰티 트렌드를 주도하게 될 거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극도로 세련된 건 살짝
뒤에 숨어있는 것처럼.”
이희는 ‘뉴 룩’의 창조자다. <친절한 금자씨> 이영애의 클래식 웨이브 펌, <멋진 하루>
전도연의 단발머리, <소름> 장진영의 쇼트 커트, 드라마 <최고의 사랑> 공효진의 C컬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수십 년째 작업하며 ‘스타 헤어의 바이블’이라 불린다. ‘성인식’의 박지윤,
‘배반의 장미’의 엄정화 등도 이희 원장이 고안한 ‘뉴 룩’ 중 하나다. 톱스타들과 작업하다 겪은
비하인드 스토리도 끝이 없다. 이희 원장을 만나보니 비로소 성공했다고 평가 받는 잣대는
타인의 기준이나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에 대한 답도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사실 이 일이 누가 시키면
못하는 일이다. 한 번도 싫은 적 없고 후회한 적도 없다. 일주일 이상 쉰 적도 없고. 너는 진짜
헤어 디자이너야. 멋있다. 난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수식 없이 온전히 헤어 디자이너로
존재하는 게 가장 멋있지 않나.”
20여 년 전부터 독학으로 메이크업을 배워 헤어와 메이크업을 디렉팅하면서 “빛과 자연의
발산으로 계산해서 가장 내추럴하고 피부 톤에 적합한” 이른바 내추럴 메이크업을 선언했고,
헤어케어 제품 개발을 시작해 연일 히트 상품을 기록한 그는 최근 ‘이희 케어 포 스타일 라인’
을 출시했다. 기존 이희 헤어 케어 라인이 두피 상태에 초점을 뒀다면 신제품은 디톡스,
모이스처라이징, 뉴트리션 등 헤어 케어의 기능을 모두 담았다.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
무대를 겨냥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과정을 지켜봐달라고 덧붙였다.
“미용은 엄밀히 말해 과학이고 기술이다. 누구는 스스로를 대단한 아티스트라고 정의하던데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고도의 기술을 연마해서 대상을 아름답게 가꿔주는 거다. 프로는
엄격하게 평가를 받는다. 프로는 한 번 잘해서는 안 된다. 계속 잘해야 된다. 또한 헤어
디자이너는 화학 제품을 다루는 직업이다. 기초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진단과 평가가
이뤄지지 않으면 머리를 할 수 없다. 단순히 커트를 잘하고 디자인을 하는 것 이상의 수준이
요구된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이희 원장이 발산하는 신뢰감과 품위가 강하게 전이됐다.
마지막으로 후배에게 전하는 조언은 이러하다. “커트 전 10분이 정말 중요하다. 고객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눈과 뜨거운 가슴이 필요하다. 절대 오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



‘현태’라는 불패신화

"나는 뷰티산업에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 라뷰티코아
출신의 아티스트가 핫한 브랜드를 만들어 청담동 살롱
문화를 이끌고 있다. 은연중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사관학교식 교육인 것 같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라뷰티코아 현태 대표는 중간이 없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청담동 디자이너 트로이카로 군림했고, 2008년 라뷰티코아
설립 5년 만에 100억대 매출과 3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렸다.
그러나 가난에 허덕이던 가정환경 때문에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유흥업소 일을 전전하던 ‘청년 현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지고 마는 패배자였다. 현태 대표는 평생의 스승 헤어뉴스의
샤니고를 만나 개과천선한다. 그때부터 현태 대표는 미용에
빠졌다. 살롱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머리를 배웠다.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동료들과 나이트클럽에 놀러 가면 일단 함께
가서 노는 척하다 일터로 돌아와 연습 시간을 보충하곤 했다고.
“꾸준히 연습하다 보니 까다로운 사람 전문가로 불렸다. 다른
미용실에서 실패한 사람도 찾아왔다. ‘망친 머리 복구반’이라
할까? 내 작은 테크닉으로 절망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다 보니
항상 희열을 느꼈다. 신이 내린 손인가 혼자 자뻑도 하고(웃음).
그때 팀워크도 좋았다. 하나로 뭉쳐 고객을 위해 집중하게
되니까.”
2년 전 ‘로레알프로페셔널파리 헤어 트렌드 쇼’에서
파이널리스트로 무대로 오른 현태 대표를 목격했을 때 나를
포함한 관객은 무조건적으로 그에게 압도됐다. 그것은 범접하기
어려운 포스와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숨막히는 긴장감과
뜨거운 에너지 속에서 현태 대표만의 고유한 속도가 있었다.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 정제된 매너,
유머 감각도 여전하다. 이 대단한 스태미나를 가진 아티스트가
켜켜이 쌓아온 이력은 눈으로 훑어 내리기에도 숨가쁘다.
그러나 현태 대표는 주어진 기회에 몸 사리지 않고 아티스트라는
운명에 순응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뷰티산업에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 같다. 신이 큰 일을
하라고 이 업계에 던져준 것 같다. 라뷰티코아 출신의
아티스트가 핫한 브랜드를 만들어 청담동 살롱 문화를 이끌고
있다. 은연중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사관학교식 교육인 것
같다. 여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최근 현태 대표의 관심사는 바로 멀티채널네트워크(MCN).
카카오톡, 배달의민족, 유튜브 스타, 뷰티인미 등 O2O
서비스를 하는 이들과 미팅을 갖곤 한다. 뷰티 트렌드가 삶의
일부인 시대, 아티스트가 1인 미디어로 절대적인 크리에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달변가로 통하는 현태 대표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인생의
가르침을 얻었다. 공부의 목표는 확고한 자기표현을 위해서.
“세상을 걸어도 가고 뛰어도 가고 점프도 하고 넘어져 보면서
그냥 삶의 경험 속에서 인생관이나 생철학을 몸으로 터득했지만
논리 정연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책, 어느 작품에서
명확하게 정의된 삶의 질서를 접하면 ‘아! 저건 내가 경험한
것이고, 내 거야’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난 후배들에게
자기표현을 가르친다. 시험이든 프레젠테이션이든 스피치든.
본인이 생각하는 걸 제대로 표현하면 리더십이 생기고 자신감이
붙는다. 결국 거기서 얻은 에너지로 고객들에게 감동적인
서비스가 전달된다.”
아티스트로서 당장 내일 죽어도 행복한 삶이라 회고하는 현태
대표. 목표도 원대하다. 다수가 추구하는 가치 이상의 것을
희망한다. “유럽과 아시아 시장에 K-뷰티를 널리 알리고 싶다.
예전에는 한국 디자이너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은 아시아권에서 인바운드 테크니컬 투어를 온다.
커리큘럼을 완벽하게 갖춘 헤어뷰티교육재단을 설립해 한국의
테크닉과 뷰티 철학을 널리 알리고 싶다.”



이순철의 진심론

"항상 새로운 자극에 열려 있고 관성적인 생각에서 탈피하려 노력한다.
진보적으로 생각한다. 일하면서 겪는 고통이나 자극
자체를 오히려 즐긴다. 긍정적은
자세로 임하다 보면 굉장한 행운과 마주칠 수 있다."

청담동 뷰티살롱을 지도로 옮긴다면 순수가 기점이 될 거다.
걸스데이, 소녀시대, 에프엑스(Fx), AOA 등 아시아권
뷰티산업에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는 걸그룹의 성지로 트렌드의
근원지니까. 8년 전 이순철 대표는 도산공원 에르메스 플래스십
스토어 뒤편에 살롱을 열어 ‘순수의 시대’를 호언했고 모두가
선망하는 지위에 올랐다. 매끈한 디자인의 지방시 슈즈를 신은
이순철 대표가 특유의 사뿐한 걸음으로 <그라피>를 맞이했다.
쾌활하고 친절한 말투도 여전했다.
“공고에서 전자통신계열을 전공한 삼성맨 출신이다. 입사 3개월
만에 삼성조선소를 그만뒀을 때 큰누나의 조언으로 미용에
몸담았다. 당시 큰누나가 엔지니어 안 할 거면 손으로 하는
기술이 최고라며 미용을 추천했던 게 지금의 내 길이 된 거다.
어쩌면 이 두 손이 천부적인 재능인 것 같다.”
이순철 대표가 처음 미용실에 발을 들인 건 스무 살 때.
6남매의 막내로 경상남도 거제에서 상경해 신림동 주택가에
숨은 듯 위치한 미용실에서 한 섹션에 몇 천원을 주고 머리 색을
노랗게 뺐다. 미용대학이 없던 때라 학원에서 기술을 배워 군
제대 후 부산에서 일하다 스승의 권유로 상경해 미용 인생 2막을
열었다. 이순철 대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명실공히 놀라운
매출을 기록하며 스타 헤어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지금도 그는
공부를 놓지 않는다. 서경대학교 미용학과, 경희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직 미용인으로서 매우 이색적으로
고려대학교 언론정보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항상 새로운 자극에 열려 있고 관성적인 생각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다. 진보적으로 생각한다. 일하면서 겪는 고통이나 자극
자체를 오히려 즐긴다. 불평하고 싶지 않다. 타인이 불만을
토로해도 위로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게 직설적으로
몰아세우는 성격이다. 어려웠던 순간은 없다. 매 순간을
즐긴다. 때론 육체적 정신적인 한계도 온다. 하지만 그걸 피할
수 없지 않나. 그것이 인생인 것 같다.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다
보면 굉장한 행운과 마주칠 수 있다.”
이순철 대표의 인생론을 들으면서 그가 걸어온 길을
생각해본다. 그의 인생관은 진심과 만나는 순간에 발산되는
에너지가 있다.“사람을 대할 때 수단으로 대하면 안 된다.
고객이든 셀럽이든 신인이든 톱스타든 그냥 공평하게 기본에
충실한다.” 또한 라이벌 운운하며 경쟁 구도를 부추기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며 호탕하게 웃다가 사뭇 진진한 어투로
다소 철학적인 의식을 내비친다. “라이벌은 오직 시간.
앞으로의 내 나이 쉰, 예순 때를 생각해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이
조금은 무섭고 두렵기도 하다. 우리는 한 단계 한 단계 죽음을
향해 가지 않나.”
그래서 이순철 대표의 24시간은 빠듯하게 돌아간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1시간 정도 타고 동호대교를 건너
퍼스널 트레이너를 만난다. 새벽 콜 타임일 때는 해당 스케줄을
끝내고 피트니스 클럽으로 간다. 살롱에서 고객을 응대하고
매거진 화보, 광고, 방송 촬영을 마치고 ‘순수 헤어 소다 샴푸’
등 제품 개발과 실험에도 관여한다. 일주일에 2번 오후 6시부터
3시간 동안 어학원을 찾는다. 이렇게 쉼 없이 일하다 가끔
스케줄이 비면 훌쩍 떠난다. 웨이크보드를 타기 위해서. 그리고
무조건 12시 전 잠을 잔다. 휴일엔 온전히 휴식. 술도 마신다.
하지만 평일에는 금주한다. 때마침 이날은 이 성공한
아티스트의 생일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심 어린 축하 자리에서
이순철 대표는 강렬한 음성으로 이런 조언을 남겼다. “지금처럼
한다면 남과 다를 수 없다.”



미지의 예술가, 주안

박승철헤어스투디오 청담점 주안 원장의 미용 인생은 우연히 시작됐다. 대학에서 순수 회화를
전공하던 당시 오직 예술로 경제 활동이 가능한 직업을 고민하다 휴학을 결심하고 입대한다.
그러다 매서운 가위를 유연하게 휘두르는 헤어 디자이너에게서 그 답을 얻는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대를 자퇴한 뒤 미용 학원에 등록해 군 제대 후 스물 셋 나이에 박승철
헤어스투디오 청담점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안 원장은 디자이너 승급제를
앞두고 돌연 퇴사를 결심한다.
“인턴 때 큰 포부를 안고 청담동 입성을 목표로 이곳에 입사했다. 무조건 큰 데서 꿈을 펼쳐야
한다는 각오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이 짧고 철이 없던 때라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디자이너
승급을 앞두고 그만 뒀다. 아마 미용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했던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첫 직장이었던 박승철 헤어스투디오 청담점을 떠나 부모님이 계시던 경기도 모처 살롱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이곳을 찾았는데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신 조순옥 원장님께서
맞아주셨다.” 이는 주안 원장에게 득과 실을 동시에 안겨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혹독한
방황이 준 결실로 열정을 되살리며 미용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깊이를 다지고 폭을 넓히는 데
온힘을 쏟았다. 이를 딛고 일어선 주안 원장은 헤어 디자이너의 덕목으로 겸손과 인내,
그리고 자신감을 꼽는 모범 답안을 내놓는다. “혼자였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주위 분들의 기대와 응원 그리고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내와 성실함은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 꼭 필요한 거다. 자신감은 물론 갖기 어렵다. 하지만 연습을 통해 길러야 한다.
열등감이나 두려움은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느끼는 거다. 수천 번, 수만 번
연습을 하면 무서울 것이 없다.” 미용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현답이다.
눈에 띄는 반듯한 외모와 나긋한 어투 때문인지 주안 원장은 업계에서 인간적인 면모로 평판이
자자하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콤플렉스였다. “한때 사람 좋다, 선하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매출도 많이 올리고 셀럽 고객도 잡으려면 카리스마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시도해봤는데 외려 사람이 변했다는 소문이 나는 등 역효과만 나더라. 가장 나답게 행동하는
것에 중요한 것 같다.” 올해의 목표는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주안 원장을 알리는 것. 매달
온라인 뷰티 스타일링 촬영을 진행하며 9월에는 중국 헤어쇼와 세미나를, 11월에는 컬러
강의를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후배와 제자의 교육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후배 육성과 관련된 전문기관을 운영하고 싶다. 나 자신이 먼저 확고하게
완성되어야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 때문에 스스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소중함에 더 절감한다. 박승철헤어스투디오 청담점 식구들과 자발적으로
꽃동네 봉사도 정기적으로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행동이 매우 뜻깊게 다가온다.”
주안 원장이 꼽는 영감의 원천은 다작. 유명 헤어 디자이너의 작품을 보고 힌트를 얻는다.
한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창작자의 의도, 감성, 그리고
현장감을 상상해본다. 또한 개인적으로 젊은 감각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 노력의 일환인지
헤어 드라이만큼은 빅뱅의 지드래곤 스타일로 주문한다. “트레이트마크인 5:5 가르마는
심심할 때 한 번씩 한다. 나이에 안 맞게 그룹 빅뱅을 좋아한다. 그래서 드라이할 때 지드래곤
스타일로 해줘. 이렇게 말한다. 하하.”


본투비 아티스트, 김선우

헤어 디자이너 김선우의 이름이나 얼굴은 온스타일 <스타일
아이콘> 등 패셔너블한 채널만 골라 시청하는 힙스터에게도
낯설지 않다. 글로벌 패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모델 아이린의
‘무지개 머리’는 김선우의 작품. 원색을 섞어 연출한 이 파격적인
룩은 인스타그램을 타고 전 세계에 은신한 수백만 명의
팔로어에게 ‘좋아요’를 얻어냈다.
열 아홉부터 미용에 입문해 올해 만 스물 아홉. “고모가 여럿인
집 안에서 자랐는데 외출하기 전 고모들이 거울 앞에서 머리하는
모습을 굉장히 좋아했다. 당시가 1980년대니까
닭벼슬머리하고 그랬을 거 아닌가. 무스 발라서 앞머리를
세우고. 그런 걸 되게 관심 있게 지켜봤다. 내 머리도 해보고.”
헤어 디자이너로 타고난 듯 숙명처럼 일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시간 따윈 없었다. 모든 것이
순탄했다.
그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고 확신에 차 답했다. 누구나
궁금해할 법한 질문을 던졌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비밀스런 행동 같은 것들. “남들이 안 보는 것을 잘 보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떤 날은 공사장 벽돌 색이 예뻐 보일 때도
있으니까. 당연히 그림도 보러 다닌다. 패션도 공부한다.
파리나 뉴욕으로 패션위크도 가고, 수입 잡지도 굉장히 많이
사서 본다. 요즘은 워낙 해외 매거진의 디지털 서비스가 활발해
매거진 사이트에 수시로 접속한다.” 지난해 시세이도
프로페셔널이 주최한 ‘뷰티 이노베이터 어워드’에서 영예의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은 장기 체류한 미국 여행에서 영감을
얻었다.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원색이 아니라 서로 조합했을
때 돋보이는 색감을 디자인한 작품으로 “생각보다 훨씬
감격스러웠다”고 소회했다.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라
포토그래퍼, 모델 등 최고의 스태프들이 뭉친 결과라고
덧붙였다.
김선우는 취향을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앤디 워홀도, 신디
셔먼도 좋아한다. 클림트나 르누아르도 좋아한다. 음악도
힙합을 듣다가 일렉트로닉을 틀다가 갑자기 클래식을 찾는
식이다.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꽂히는 게 있다고. 선호하는
헤어 스타일의 폭도 넓고 깊다. “펌이 다 풀린 것 같은 나른한
프렌치 무드의 스타일부터 매우 극단적으로 인위적인 핀업걸
스타일로 연출하는 걸 선호한다. 그러니까 어설픈 거, 틀에
박혀 있는 건 싫다. 25호 롯드로 말아, 28호로 말아. 그런 건
지루하다. 난 정말 매일 매일이 다르다. 술을 새벽 4시까지
마시다 그날 6시에 출근하기도 한다. 한창 연습할 때는 하루 2
시간만 자고 한 적도 있다. 이렇게 휘몰아 치다 한번씩 몰아서
밀린 잠을 보충한다.”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백스테이지의 황태자 귀도 팔라우. 강약
조절이 헤어 디자인의 절대 요소라 생각하는 김선우는 이 스타일
메이커의 컬렉션에서 구도, 볼륨, 형태 등을 배운다. “재능이나
자질이 부족해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는 게 미용이다.
처음에는 롯드를 못 말다가 죽도록 반복하다 보면 손에 익는다.
포기하지 마라. 하다 보면 성취한다. 그때마다 보상이 있다.”
세간의 호들갑스러운 관심에 다소 무덤덤한 김선우가 또렷한
음성으로 ‘헝그리 정신’을 강조했다. 결국 김선우는
자유분방하게 거침없이 원하는 바를 다 얻어냈다. 연초에
계획을 세우고 그걸 달성할 때까지 노력하는 치밀한 면모도
지녔다. 올해의 목표는 다양한 커리어를 쌓는 것. 김선우의
궁극적인 계획은 모두의 예상대로 해외에 진출하는 거다.
미래를 현재로 성취하는 김선우를 주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