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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TALK]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 그라피매거진
  • 승인 2016.12.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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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스크린 샷

하루만 사는 여자, 루시 “사랑을 도망칠 때 자연스럽게란 말은 하지 마/사랑은 물과 같이 높은 곳에서 흐르지”(권나무,<사랑은 높은 곳에서 흐르지>)여름을 두고 흔히 사랑의 계절이라고 부르죠. 푸른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한껏 느슨해진 마음 사이로 누군가 걸어 들어옵니다. 이제야 내 운명을 만났다는기쁨에 가슴이 벅차 오르죠. 하지만 여름날의 꿈같은 사랑에도 시련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때로 소나기를 만난 듯 감정이 차갑게 식기도 하고, 해변에 버려진 빈 술병처럼 쓰디쓴 숙취로 남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아픔을 겪으며 사랑은 더욱 단단히 여물어갑니다. 태풍 뒤에 더욱 눈부신 하늘처럼 말이죠.
여름날의 사랑을 다룬 영화 가운데 딱 한 편만 골라보라면 단연 <첫 키스만 50번째>(2004)를꼽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한 영화니까요. 아담 샌들러와드류 베리모어의 환상적인 궁합은 모든 로맨틱 코미디를 통틀어도 단연 으뜸입니다. 영화가끝난 뒤에 여진처럼 남는 감동도 길고 아련하죠. 아직 안 보신 분들이라면 과연 어떤 영화길래이렇게 초반부터 극찬을 하나 궁금하실 겁니다.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루시. 젊고 아름답죠. 그녀가 웃을 때마다 마음이 봄밭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그리고 루시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린 남자, 헨리가 등장하죠. 여자와 진지한 사랑을 하는 것은 젊음을 기만하는 거라 여겼던 바람둥이 헨리도 루시를 바라볼 때면 사슴처럼 순정한 눈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에는 커다란 난관이 있습니다. 그건 루시가 단 하루밖에 기억을 하지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 골드필드 증후군(Goldfield’sSyndrome)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죠.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루시는 하루가 지나면 모든 기억이 리셋되어버립니다. 어제 만났던 사람을 오늘 또 만나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 병은 영화에만 등장하는 가상의 병입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리가 없죠.

태엽 감는 남자, 헨리
기억의 유통기한이 하루밖에 되지 않는 여자보다 더 슬프고 딱한 건 그런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일 겁니다. 헨리는 루시의 병을 알면서도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그녀의 기억을 유지시키려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죠. 그러자 헨리는 작전을 변경합니다. 그녀를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면, 자신이 바뀌면 된다고 말이죠. 매일매일 헨리를 만날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루시를 위해 기꺼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맞춰갑니다. 헨리와 입을 맞출 때마다 “첫 키스만큼 좋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루시. 하루가 지나면 기억이 소멸되어버리는 루시에겐 당연한 일입니다. ‘첫 키스만 50번째’라는 제목도 그래서 탄생하게 되죠.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헨리로 하여금 그런 고단함과 수고를 감내하게 만든 걸까요? 단지 루시가 젊고 예쁘고 매력적이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헨리가 국제난민기구 수준의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남성이라고 볼 수도 없죠. 하루가 지나면 다시 고장 난 시계처럼 기억이 멈춰버리는 여자. 그녀를 위해 묵묵히 멈춰버린 시계의 태엽을 감아주는 남자. 이 숭고한 희생의 실체는 바로 사랑이란 흔하디 흔한 감정입니다. 어쩌면 너무 흔하고 닳아 문드러진 사랑에 대해 우리가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들죠. 불꽃처럼 찾아왔다가 숙취처럼 사라지는 게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믿어왔건만, 두 사람의 사랑은 매일 매일이 새로울 뿐입니다. 장애가 축복이 되는 시간입니다.

시간은 고이고 사랑은 흐른다 단 하루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루시에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추억을 쌓아가는 사랑이란 감정은 처음부터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헨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죠. 헨리는 오늘만 사는 모퉁이 인생처럼 하루 동안만 온전한 삶이 허락되는 루시의 장애를 화수분처럼 매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장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사랑할 때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란 마치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흐르며 상대의 마음에, 인생에 길고 긴 고랑을 만듭니다. 설령 자신의 삶이 마르고 갈라지더라도 아래로 흐르기를 멈추지 않죠. 주는 것밖에 모르는 바보, 받는 것밖에 모르는 천치. 이 대책 없는 커플이 마냥 동화적이거나 신파로 느껴지지 않는 건 우리 모두 이런 사랑을 꿈꿔왔거나 한때 겪어봤기 때문이겠죠. 물론 모두가 영화처럼 아름다운 엔딩을 맞이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랑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지는 요즘입니다. 끝없는 소유만이 상대방을 온전히 얻는 방법이라 착각하거나 사랑을 할 때도 엄연히 도의가 있음을 망각하기도 합니다. 합리적이라는 미명 아래 각자가 품은 사랑의 질량을 저울질하거나 끊임없이 욕망의 좌표를 곁눈질하곤 합니다. 모든 면에서 대등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지만 감정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주판알을 튕기는 시간이 많다는 게 문제겠죠. 비단 남녀관계에 국한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조직 내에서도 이런 예는 비일비재하죠. 준 만큼 받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니까요. 때로 허점투성이의 상대가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위와 나이를 앞세워 애정과 헌신을 강요하는 일도 허다하고요. 단점을 들킨 사람도, 단점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도 서로에게 투쟁하듯 투정부리는 것은 매한가지죠. 그때서야 알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말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하루에 불과하지만 온종일 행복함에 젖어 잠들 수 있는 루시.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을 즐거운 기다림으로 치환시킬 줄 아는 헨리. 헨리 같은 인생의 반쪽을 만나느냐, 루시 같은 인생의 반쪽이 되느냐는 각자의 몫입니다. 어느 쪽도 쉽지 않겠지만 그만한 각오는 한 번쯤 시도해볼 가치가 있지 않겠어요? 지금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됐다면 말입니다.


50 First Dates, 2004
감독: 피터 시걸
출연: 아담 샌들러, 드류 베리모어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산(山),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