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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된다는 것 - 영화 리뷰 '프리다의 그해 여름'
  • 성재희
  • 승인 2020.06.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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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요즘엔 사진 앨범을 보며 추억에 젖는 일이 거의 없죠. 친절하고 영특한 SNS가 ‘과거의 오늘’이란 이름으로 나도 몰랐던 일들까지 다 소환해주니까요. 그래도 문득문득 옷장 위에 폐지처럼 쌓아놓은 앨범에 손이 가는 걸 보면 저도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빛바랜 사각형의 기억 속에는 하얀색 스타킹을 신고 촌스러운 바가지머리를 한 소년이 엄마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습니다. 한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년의 얼굴에는 펑펑 울다 그친 기색이 역력합니다.
 
집요한 형사처럼 오래된 기억을 심문한 끝에 그날 내가 공원에서 미아가 될 뻔했었단 사실을 떠올려냈습니다. 어어 하는 사이 엄마 손을 놓치고 혼자가 됐을 때,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엄마!”라는 다급한 외침은 성질 급한 울음과 뒤섞여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이 됐고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죠. 운 좋게 잊고 있었을 뿐, 여전히 내 몸은 그날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원처럼 느껴졌던 10여 분이 지나고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엄마의 얼굴까지도요.
 
그 잠깐의 이별이 얼마나 서럽고 무서웠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알죠. 하물며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영영 혼자가 된 아이가 느끼는 상실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 속 소녀가 겪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스페인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2017)은 카를라 시몬 감독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유년 시절 경험을 토대로 완성한 성장 드라마인데요.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원숙한 연출력을 뽐내며 뜨거운 찬사를 받았죠.
 
슬픔과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소녀의 실수와 말썽이 줄거리의 전부이지만 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모두의 공감을 끌어냅니다. 여섯 살. 아직은 엄마라는 존재가 절대적인 나이.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떡해야 할지 모릅니다. 공원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입안 가득 폭발 직전의 울음을 머금은 채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뿐이죠.
 
그해 여름, 프리다는 엄마를 영영 잃었습니다. 동시에 홀로 남은 자신의 삶을 슬픔으로부터 구원해줄 가족을 만났습니다.


가족, 행복한 소란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스크린샷

병에 걸려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 남겨진 프리다. 아직 죽음의 의미를 잘 모르는 어린 소녀는 외삼촌 내외가 맡기로 합니다. 외삼촌을 따라 바르셀로나를 떠나 시골로 내려간 프리다에게 모든 게 낯설기만 하죠.

엄마의 입맞춤 없이 눈을 뜨는 아침은 여전히 비현실적입니다. 숙모가 아무리 상냥하게 대해준들, 그녀가 엄마일 순 없으니까요. 게다가 사촌 동생 아나에게 웬일인지 자꾸 샘 많은 언니처럼 야박하게 굽니다.
 
거짓말까지 해가며 숙모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사랑에 목말라 하죠. 외삼촌 내외와 아나가 꾸려가는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풍경이 프리다로 하여금 엄마를 더욱 그립게 만드는가 봅니다. 그리움이 서러움으로 바뀔 무렵, 프리다가 기어이 사고를 칩니다.
 
술래잡기한다며 아나를 숲속에 혼자 두고 온 날, 숙모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혀버렸죠. 그나마 자신의 편이 되어주던 외삼촌마저 호되게 꾸중하자 프리다는 이곳에 더는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고 느낍니다. 끝내 한밤의 가출 소동까지 벌이면서 외삼촌 내외를 더욱 속상하게 만들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 영화에 숨어 있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보입니다. 먼저 음악이 없습니다. 프리다의 슬픔과 기쁨을 과장하거나 동조를 구하지 않고 끝까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 유익한 거리 두기는 아이의 눈높이로 몸을 숙이고 감정의 온도를 낮춘 채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계된 영화적 장치죠.
 
또 하나는 프리다를 향한 보이지 않는 시선의 정체입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감독 자신의 눈이겠죠.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자신의 감정을 부풀려 설명하기 마련이지만 카를라 시몬 감독은 그런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과거의 나’를 지켜봅니다. 프리다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엄마 잃은 자신을 향한 따뜻한 위로와 관심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고 아파하는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 매일 밤 젖은 머리를 말려줄 때마다 벌어지는 행복한 소란, 그 따스한 감촉과 한없이 푸근한 가족이란 이름의 체취가 더욱 그리웠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신. 변변한 음악조차 흐르지 않는 소녀의 기묘한 여름을 단숨에 사랑하게 만드는 명장면입니다. 물어봐도 안 알려줄 거니까 궁금하면 꼭 영화를 보시라 애태우고 싶을 만큼.
 
프리다의 그해 여름 Estiu 1993, Summer 1993, 2017
감독 카를라 시몬
주연 라이아 아르티가스, 브루나 쿠시, 데이비드 베르다거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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