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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초상 - 영화 리뷰 '썸머 스토리'
  • 성재희
  • 승인 2020.08.2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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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스 해가드 감독의 1988년 작 <썸머 스토리>. 올드팬들로부터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추억의 명화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해마다 이맘때면 누가 스위치를 누른 듯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옛날 노래. 굳이 연식을 드러내고 싶진 않지만, 홍시 맛이 나니까 홍시라고 하듯 옛날 사람인데 옛날 노래가 익숙한 것도 당연한 노릇이겠죠. 분명 듀스와 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했건만, 어째서 추억의 애창곡은 모두 길 잃은 연어처럼 대학가요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걸까요? 나이가 들었단 슬픈 방증이겠죠. 어느 순간, 생전 쳐다보지도 않던 떡이 맛있어질 무렵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 예감은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청춘에게 여름은 기쁨의 연속일 겁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를 함께 걸어도, 심술궂은 소나기에 온몸이 젖어도, 짧은 처마 밑에서 가만히 젖은 어깨만 대고 있어도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웃음이 나죠. 하지만 열병처럼 삽시간에 뜨겁게 타올랐던 사랑은 예기치 못한 차가운 이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리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그리움이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뼈아픈 후회로 남는가 하면, 성장의 발판이 되죠. 돌아보면 분명 가슴 아픈 사랑이었지만 여름은 그것마저 아름답게 물들이고 더 절절한 추억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피에스 해가드 감독의 1988년 작 <썸머 스토리>는 이런 여름날의 사랑을 충실히 묘사한 모범적 사례로 꼽을 수 있습니다. 제작된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올드팬들로부터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추억의 명화죠.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했던 사랑이 끝내 비극으로 막을 내릴 때, 문득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원작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존 갈스워디의 소설 <사과나무>(1916)입니다. 존 갈스워디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었는데요.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쌓은 경험과 영감에 힘입어 법정을 내려와 책상 앞에 앉았고 작가로서 대성공을 거뒀죠.

흥미로운 사실은 <썸머 스토리>의 주인공 역시 여름휴가 기간에 자유롭게 여행을 즐기는 중인 젊은 변호사란 겁니다. 과연 자신의 실제 경험담을 소설로 녹여냈는지, 아니면 허구에 불과한지 궁금증이 치밀지만, 소설이란 원래 그런 게 아니겠어요? 겪고도 아닌 척, 몰라도 아는 척 대중을 현혹하는 고급한 기술이니까요.

이별의 눈부심

때는 1904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 런던의 젊은 변호사 프랭크가 여름휴가를 맞아 친구와 함께 영국 남서부 다트무어를 지나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책을 넘다가 발목이 접질려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하자 마침 근방을 지나던 메간에게 도움을 청하는데요. 그녀는 기꺼이 프랭크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는 한편 정성껏 치료를 해주며 친절을 베풀죠. 한창 단내를 풍기기 시작한 여름 과일 같은 두 남녀 사이에 묘한 감정이 싹트는 것은 당연지사. 비록 대도시의 엘리트 청년과 시골 농가의 처녀라는 신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프랭크는 온종일 메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메간은 그에게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킬까 봐 조마조마합니다.

문제가 있다면 메간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정인 조가 있다는 사실인데요. 프랭크는 그녀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구원자였지만, 조에게는 고통과 원망을 안겨준 이방인일 뿐입니다. 결국 쫓기듯 농가를 떠나게 된 프랭크. 다급한 마음에 메간에게 도시로 나가 돈을 구해올 테니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 결혼하자고 설득합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약속은 좀처럼 지켜지는 법이 없죠. 아슬아슬 몇 번의 기회가 날아가고 잔뜩 들떠 있던 프랭크의 마음이 식어갈 무렵, 교활한 현실이 기다렸다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그를 찾아 낯선 도시를 헤매고 있는 메간을 외면하는 순간, 섬광처럼 잠시 눈을 멀게 한 여름날의 사랑도 끝나고 말죠.

유약하고 파렴치한 남자에 대한 한숨과 분노도 잠시, 그로부터 18년 후 염탐하듯 옛 추억이 어린 다트무어를 찾은 프랭크는 메간이 자신의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말을 잇지 못하는데요. 후회와 연민에 쌓여 마을을 떠나던 그의 앞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은 청년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치닫습니다. 영국 남서부의 그림 같은 전원 풍경, 눈물샘을 폭발시키는 슬픈 사랑, 프랑스의 거장 조르주 들르뤼가 선사하는 애절한 선율의 삼박자는 가히 신파의 정석이라 부를 만합니다.

한바탕 펑펑 울고 나니 어느새 무더위마저 싹 가신 여름밤. 오래전 헤어진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해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스톱. 그때 우린 미쳤었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무용담을 혼자 웅얼거리는 선에서 끝내시길 권장합니다.

썸머 스토리 A Summer Story, 1988
감독 피에스 해가드
주연 제임스 윌비, 이모겐 스텁스

글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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