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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에 남녀 구별 없다, 화장품 젠더리스 바람
  • 김도현 에디터
  • 승인 2020.11.0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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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화장품 시장에는 남성 전용 제품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스킨, 로션, 에센스와 같은 기초 제품은 물론 헤어와 보디 카테고리까지, 화장품과 생활용품 전반에 ‘남성 전용’이 유행처럼 번졌다. 타깃 세분화는 시장 확대를 위한 마케팅 전략의 기본이다. ‘남성 전용’ 화장품 또한 포화 상태에 이른 시장을 돌파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블랙 혹은 블루 톤 컬러를 입힌 심플하고 날렵한 디자인의 용기에 ‘for men’이나 ‘homme’ 문구를 단 남성 전용 화장품은 때마침 불어온 그루밍(grooming) 바람을 타고 인기를 모았다. 한국이 전 세계 남성 뷰티시장을 선도한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그런데 어느새 남성 전용 화장품 열풍이 시들하다. 최근 분위기는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제품은 달라야 한다’라는 논리가 고루하게 느껴질 정도다. 성별의 경계를 넘는 젠더리스(genderless) 트렌드가 정치,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스며들면서 화장품업계의 ‘남녀유별’도 옛이야기가 돼가고 있다.

 

메이크업 화보 속 달라진 남자 모델

 

지난 2008년 에뛰드는 국내 최초 남성 전용 메이크업 라인을 선보였다. 그전에도 남성용 컬러 로션이나 비비크림 정도는 있었지만 포인트 메이크업 제품까지 남성용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당시 그루밍 연예인의 대표 격으로 꼽히던 배우 장근석이 에뛰드의 모델로 발탁돼 남성용 BB크림, 눈썹 에센스, 눈썹 펜슬, 립 케어젤 등의 홍보에 나섰다.

 

물론 당시 남성용 메이크업 제품들은 이른바 ‘투명 화장’이라는 콘셉트로 개발됐기에 발라봤자 화장한 티가 크게 나지 않았다. 검은 가죽 재킷에 라이딩 장갑까지 낀 장근석 화보는 오히려 남성성이 강조됐다.

 

최근 남자 연예인들의 메이크업 화보는 다르다. 지방시뷰티의 강다니엘, 클리오의 김우석(업텐션), 토니모리의 김요한(위아이), 티르티르의 백현(엑소), 베네피트의 하성운, 랑콤의 민현(뉴이스트). 이들은 남성용이 아닌 여성용, 아니 굳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은 메이크업 제품으로 얼굴을 희고 곱게 정돈하고 눈매를 날렵하게 다듬었으며 입술은 붉게 물들인 채 섹시미를 강조한 화보를 선보이고 있다.

 

엘러브의 '하이드라 바이탈라이징 크림' 화보

‘나’다움을 표현하는 데 제약이란 없다, 성별조차

 

‘섹스(Sex)’가 생물학적 성별을 뜻한다면 ‘젠더(gender)’는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남녀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젠더리스(genderless)’는 ‘젠더’에 특성을 없애는 접미사 ‘less’를 결합한 단어다. 말 그대로 ‘성의 구별이 없는’ 또는 ‘중성적인’이라는 뜻을 담았다.

 

성의 개념을 초월하고 성별에 따라 부여된 역할과 행동 양식, 책임, 즉 ‘젠더’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성의 구분, 성별에 따른 차이를 없애자는 ‘성 중립성(gender eutrality)’, 성에 의한 역할은 고정돼 있지 않으며 개인의 성 정체성도 선택 가능하다고 보는 ‘성 유동성(gender fluid)’ 또한 젠더리스와 맥락을 같이하는 개념이다.

 

으레 남자아기에겐 파란 계열 옷을, 여자아기에겐 붉은 계열 옷을 입혀온 기성세대에겐 이같은 성 파괴 현상이 의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찌감치 성 평등 교육을 받고 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온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젠더리스 트렌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하고 다름을 존중하는 이들은 ‘나’다움을 찾는데 전통적인 기준과 사회적 제약을 거부한다. 삶의 방식과 미적 기준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태도다. 성별 또한 얼마든지 넘을 수 있는 선일 뿐이다. 삶을 살아가고 나를 표현함에 있어 남녀의 방식이 따로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바뀌고 시장이 변화하다

 

이들 MZ세대가 전면에 나서면서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런던의 지하철 안내방송에선 ‘신사 숙녀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이라는 표현을 ‘여러분 안녕하세요(Hello everyone)’로 대체했다. 하버드 대학교는 학생들이 자신의 성별을 표시할 때, 남성 또는 여성이 아닌 성별 중립 인칭대명사인 ‘ze’나 ‘they’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스웨덴과 미국에서는 곳곳에 성별 구분 없이 사용하는 ‘성 중립 화장실(Gender neutral restroom)’이 들어서고 있다.

 

영화를 포함한 공연계에서도 성별 구분 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이 확산되고 있다. 국내에선 경찰 마스코트 포순이가 탄생 21년 만에 속눈썹을 떼고 치마 대신 바지를 입었다. 공전의 히트 캐릭터 ‘펭수’는 남성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나 때론 화관을 쓰고 드레스를 입기도 하며 자신의 성별을 불문에 부치고 있다.

 

신생 저비용항공사 에어로케이는 블라우스와 좁은 치마, 힐 대신 편한 티셔츠와 바지, 운동화를 여성 승무원의 유니폼으로 채택했다. 금발 백인 여성의 대명사이기도 한 바비인형의 제조사인 마텔사는 성 중립 인형을 선보였다. 인형을 판매하는 유통업체들은 완구 제품에 ‘남아용’ ‘여아용’ 등의 표기를 없애기 시작했다.

 

가장 파격적인 변화는 패션업계에서 일고 있다. 남자가 입어도, 여자가 입어도 무난한 과거의 ‘유니섹스’ 트렌드와는 차원이 다르다. 구찌, 루이 비통, 마크제이콥스 등 이른바 하이패션 브랜드에선 남성 모델에게 꽃무늬 자수로 장식한 수트, 큰 리본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히는가 하면 하이힐을 신기고 핸드백을 들게 하고 있다. 여성 모델들은 턱시도를 입거나 큼지막한 가죽 재킷에 털 방울 모자를 걸치고 런웨이를 걷는다. 패션쇼 역시 예전에는 남성과 여성 컬렉션이 엄격히 구분됐지만 이제 통합해 여는 추세다.

 

매스패션 업계도 앞다퉈 젠더리스 트렌드에 동참하고 있다. SPA 브랜드 자라가 선보인 언젠더드(Ungendered) 라인은 남성복과 여성복이 따로 없으며 나이키 또한 남녀 공히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젠더리스 컬렉션을 전개하고 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의 셀프리지(Selfridge) 백화점은 젠더의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콘셉트 스토어인 ‘에이젠더(Agender)’를 선보였고 뉴욕에는 세계 최초 성 중립 편집숍인 ‘더 플루이드 프로젝트(The Phluid Project)’가 오픈해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브랜드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에어로케이의 젠더리스 유니폼(위), 스쿨룩스의 여학생 바지 교복(아래 왼쪽), 마텔의 성중립 바비 인형
에어로케이의 젠더리스 유니폼(위), 스쿨룩스의 여학생 바지 교복(아래 왼쪽), 마텔의 성중립 바비 인형

뷰티도 남녀 구분 사라진다

 

패션업계만큼이나 트렌드에 민감한 뷰티업계에도 ‘젠더리스’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KOTRA 시카고 무역관은 지난 2018년 6월 발간한 ‘젠더리스, 성별의 경계를 뛰어넘은 미국 시장 트렌드’ 보고서를 통해 “맥,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 등이 유니섹스 화장품 라인을 출시하고 성 구분이 없는 화장품을 판매하고 있다”면서 기존의 대형 브랜드가 성 중립 화장품 라인의 확장을 꾀하는 한편, 젠더리스 콘셉트를 주요 정체성으로 내세운 브랜드도 등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젠더리스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운 대표적인 브랜드가 ‘플루이드(Fluide)’다. ‘모두를 위한 메이크업(Makeup for everyone)’을 표방하는 플루이드는 메이크업은 특정한 성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양한 정체성의 모델들을 활용하고 있다. 영국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제시카 블래클러가 론칭한 화장품 브랜드 ‘제카(Jecca)’ 또한 ‘메이크업에는 성별이 없다(Makeup has no gender)’는 슬로건과 함께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함께 봉사활동을 펼치고 관련 행사에 참여하며 제품을 알리고 있다.

 

일본에서도 ‘파이브이즘×쓰리(FIVEISM×THREE)’, ‘누도(Nudo)’, ‘니제로네오(20Neo)’, ‘날크(Nalc)’ 등 젠더리스 브랜드가 잇따라 등장하며 남성을 화장품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대한화장품산업연구원은 지난 7월 내놓은 ‘글로벌 코스메틱 포커스 2020년 5호 일본편’에서 “일본 화장품업계에 젠더리스 트렌드가 확산하면서 남성들이 메이크업을 하고 여성들이 중성적인 스타일을 시도하는 추세다. 특히 K-pop 남자 아이돌, 콘도 요우지와 같이 화장하는 남성들이 빈번하게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젊은 남성층을 중심으로 메이크업 제품 수요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화장품업계에서도 젠더리스 트렌드가 확산 일로다. 특히 향수 시장에서 그 흐름이 뚜렷하다. 여자는 꽃이나 과일에서 온 달콤하고 상큼한 향, 남자는 나무나 풀에서 얻은 시원한 향이라는 기존의 분류법을 넘어 중성적인 향을 지닌 남녀공용 향수가 잇따라 나와 인기를 모으고 있다.

 

CJ올리브영에서는 희소성 있는 향기와 디자인으로 남녀 모두가 사용하는 니치 향수 판매량이 증가하고 있다. 올리브영 관계자는 “남성용과 여성용이 뚜렷하던 향수 시장도 ‘젠더리스’ 바람이 불면서 국내 중소 브랜드를 중심으로 여성이 좋아하는 남성 향수, 남녀 구분 없이 누구나 사용 가능한 향수가 출시되고 있다”고 전했다.

 

메이크업 부문에서도 젠더리스 브랜드가 두각을 보이고 있다. 2018년 2월 론칭한 ‘라카(LAKA)’는 국내 최초로 젠더뉴트럴을 표방한 메이크업 브랜드로 꼽힌다. ‘컬러는 원래 모두의 것’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여자와 남자 공히 사용할 수 있는 메이크업 제품을 선보여 자연스러운 화장을 원하는 여성, 화장에 관심이 많은 남성에게 고루 인기를 얻고 있다.

 

국내에서 적잖은 화제를 모으며 일본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도 진출한 라카의 성공에 고무된 화장품업계에는 스킨케어와 메이크업 분야를 막론하고 젠더리스 브랜드가 줄을 잇고 있다. 신규뿐 아니라 기존 국내외 브랜드들 또한 새로운 트렌드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젠더리스’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남성 모델 활용 폭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눈길을 끌곤 한다.

 

다만 이 같은 방식이 MZ세대의 지향점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란 평가다. 관습적인 성 역할과 고정관념, 성 평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마치 유행을 따르듯 너도나도 젠더리스 트렌드에 편승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 화장품 브랜드 관계자는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남자 아이돌 모델 화보에서 젠더리스의 화두를 읽긴 어려운 것 같다”라며 “화보에 각종 굿즈까지 노골적으로 여성 팬덤을 겨냥한 프로모션이 전개되면서 오히려 젠더리스 철학과 대척점에 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라고 말했다.

 

국내 첫 젠더 뉴트럴 메이크업 브랜드를 표방하며 론칭한 라카 화보(위),  아래 상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클리오×김우석 화보, 지방시뷰티×강다니엘 화보, 토니모리×김요한 화보, 베네피트×하성운 화보
국내 첫 젠더 뉴트럴 메이크업 브랜드를 표방하며 론칭한 라카 화보(위), 아래 상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클리오×김우석 화보, 지방시뷰티×강다니엘 화보, 토니모리×김요한 화보, 베네피트×하성운 화보

에디터 김도현(cosgraph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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