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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영화 리뷰 '나의 마지막 수트'
  • 성재희
  • 승인 2020.11.2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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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의 마지막 수트' 

노인과 전쟁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허락된 생의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릴수록 마지막이란 단어가 품은 비장함에 숙연해지기 마련입니다. 그건 꼭 전 재산이 걸린 도박판의 마지막 배팅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지켜야 할 약속도, 모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걸음을 재촉하죠. 

노구를 이끌고 어쩌면 실패로 끝날지도 모르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떠납니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쌓은 연륜은 그들의 든든한 무기가 되죠. 때론 노인 특유의 뻔뻔함으로 껄끄러운 상황을 모면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으로부터 도움과 용기를 얻는 행운도 누리고요.

여기 한 노인이 있습니다. 평생을 재단사로 살아온 그에게는 아직 끝내지 못한 임무가 하나 있죠. 너를 위한 수트를 만들어 반드시 돌아오겠노라 친구에게 했던 약속. 무려 70년 전의 일이기에 지금 친구의 생사조차 알 수 없지만, 노인은 길 위에서 죽어도 좋다는 일념으로 성치도 않은 몸에 낡은 수트 케이스를 들쳐 메고 집을 나섭니다.

파블로 솔라르스 감독의 2017년작, <나의 마지막 수트>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비장한 출사표를 던진 한 노인의 여행을 그린 영화인데요. 누가 봐도 고생길이 훤하건만 이 노친네, 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파블로 솔라르스 감독은 최근 몇 년 사이 남미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야기꾼입니다. 각본의 흥미진진함은 물론 섬세한 연출력까지 더해 내놓는 작품마다 감동과 웃음을 선사하고 있죠. 

<나의 마지막 수트>는 파블로 솔라르스 감독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겪었던 유대인의 참상에 비슷한 처지의 노인이 들려준 실화를 더해 완성한 작품입니다. 최고의 각본가란 찬사에 걸맞게 참혹한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을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내 호평받았죠. 

우리는 모두 홀로코스트가 인류사의 가장 끔찍했던 비극임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 잔혹한 살육을 겪은 이들의 아픔을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 정도로만 인식할 뿐. 이 영화의 미덕은 우리의 정서와 그들의 상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단숨에 줄여놓습니다. 그저 한마디의 ‘금지어’만으로 말이죠. 

비극에서 피어난 위트

올해 나이 88세. 교통사고로 죽어도 자연사로 판정될 고령의 아브라함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여행을 결심한 것은, 낡은 수트 케이스 때문입니다. 그건 만나야 할 사람과 지켜야 할 약속,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하는 푸른 신호등이었죠. 한쪽 다리도 성치 않은 몸으로 가려고 하는 곳은 다름 아닌 폴란드. 그가 있는 아르헨티나에서 무려 12800km나 떨어진 곳입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와 프랑스 파리, 독일까지 통과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 게다가 석연찮은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정작 아브라함은 좀처럼 목적지인 ‘폴란드’란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단호한 침묵에는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합니다.

실제로 파블로 솔라르스 감독의 할아버지는 ‘폴란드’란 단어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고 합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할아버지에게 폴란드는 죽음 그 자체였고 그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과 싸워야 했을 테니까요.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게 무참하게 온 가족이 학살당해야 했죠. 겨우 혼자 목숨을 부지한 그를 모두가 외면했지만, 단 한사람 피오트레크는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정성껏 돌봐준 친구였죠. 천신만고 끝에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왔건만, 지도를 보는 아브라함의 얼굴에 또다시 그늘이 드리웁니다.

열차를 타고 폴란드를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독일. 가족을 몰살시킨 철천지원수의 땅은 한 뼘도 밟고 싶지 않았죠. 그런데 곤경에 처한 그를 성심껏 돕고 나선 것은 뜻밖에도 독일인 인류학자 잉그리드였습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사과와 위로에서 용기를 얻은 아브라함은 원수의 땅을 당당히 딛고 꿈에 그리던 고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침내 도착한 고향 로츠. 하지만 반갑게 달려나올 줄 알았던 친구는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겨우 지탱해온 삶의 의지마저 꺾이려던 그때,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70년의 세월을 단숨에 건너뛰어 서로를 알아봅니다. 오늘 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겠죠. 노인의 마지막 여정을 지켜본 우리의 밤도 그럴 겁니다. 

나의 마지막 수트 El Ultimo Traje, 2017
감독 파블로 솔라르스
배우 미겔 앙헬 솔라, 앙헬라 몰리나, 마틴 피로얀스키

| 씨네쿠리
영화, 음악, 자전거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잡식남. 물적 가난과 심적 풍요 사이에서 아빠 카드 긁듯 별 고민 없이 문장과 기억들을 소비 중이다. 

에디터 성재희(beautygraph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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